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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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10월 8일 국행수륙재 5재 법문
지운스님 2023-10-08
네, 반갑습니다. 국행수륙재라고 해서 왜 국행이 붙었는가 한번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공부를 해봤죠. 1397년에 이성계가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서 이 진관사에서 처음으로 수륙재를 봉행했다는 겁니다. 625년 전이죠.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수륙재를 지내야 되는가. 수륙재는 물에 사는 중생, 육지에 사는 중생들, 그 영혼을 달래주고 천도하는 의식이죠. 그런데 지구상에서 1년에 이 중생들이 몇 명이 죽는가. 깜짝 놀랐습니다, 찾아보고는. 600억이나 되는 동물들이 죽습니다. 소, 돼지부터 해서, 가장 많이 죽는 중생은 닭입니다. 1년에 500억 마리가 죽습니다. 동물들하고 우리하고 어떤 면에서 차이가 없어요. 동물들도 기억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알고, 아파할 줄 알아요. 감정이 있어요. 똑같은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 얘기를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왜 죽어야 하는지. 많은 생명이 죽을 때에는 거기에는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바로 인간의 무지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내용이 12연기(十二緣起)인데, 그 연기법에 보면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무명은 무지를 이야기하는데, 무명으로부터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겁니다. 수많은 생명이 죽는 것은 이 무명, 무지에 의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무지에 의해 가지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거죠.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죠. 유럽 쪽이나 미국 쪽에 산불이 난다든지 홍수가 난다든지 이런 게 기후 변화에서 오는 이 동물의 죽음과 상호 관계가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학자들이 다른 고기는 그러더라도 소고기만은 먹지 않으면 지구 온도 1도는 낮출 수가 있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예요. 자동차 한 대가 탄소를 발생하는 것은 소 4마리하고 같이 맞먹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차보다는 소가 더 많다는 겁니다. 소가 방귀 뀌고 하품하고 전부 다 탄소입니다. 그런데 그 동물을 맛으로 먹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죠. 고기 1kg를 얻기 위해서는 곡물 4kg를 소에게 먹여야 돼요. 이런 것은 전부 다 무지에서 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다 들었으리라 보고요. 무지, 무명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는가에 대해서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죠. 혹시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신 분 계시죠? 그 사건은 여러 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지만은, 불교적인 시각에서 보면은 무명, 무지에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1938년도에 독일 과학자가 원자를 쪼개니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도 2차 대전이 발발을 하죠. 그리고 유대계 독일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이름으로 편지를 쓰죠. 트루먼대통령에게.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면 안 된다는 거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될 거니까, 미국에서 먼저 만들어야 된다고 탄원서를 넣는 거죠. 그런데 미국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보부에 정보를 제공했죠. 그래서 원자폭탄을 만들기로 한 겁니다. 오펜하이머가 책임자고 많은 과학자들을 규합해서 3주 만에 폭탄을 만들어내죠. 히로시마하고 나가사키에 폭탄이 투하됨으로 해서 약 30만 명이 한 번에 죽었습니다. 근데 이건 어디서 비롯됐습니까? 히틀러는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무지에서 기인하는 거죠. 무명이 있다는 것은 결국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수륙재를 왜 하겠습니까? 무지에서 벗어나야 되겠죠. 많은 생명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재를 올리고, 극락왕생을 빌고 이렇게 하는데, 근본적인 문제는 이 무명을 없애는 데 주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봅니다. 능가경에 보면은 이런 얘기가 있죠. 시비라는 왕이 있는데, 이 왕이 보시하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인드라 신, 신들의 왕인 인드라 신이 한번 시험을 해봐야겠다, 그러고는 이제 비둘기로 매한테 쫓기는 연기를 하죠. 왕에게 가서 “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저 매가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비왕이 비둘기를 감싸주죠. “그거 내 먹이니까 내달라.” “그러면 이 비둘기 먹이만큼 내가 고기를 주겠다.” 그러니까 매가 하는 말이 “나는 따뜻한 피와 살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왕이 그러면은 “내 허벅지를 베어주겠다.” 허벅지를 베어주겠다 하니까 허벅지 고기는 따뜻한 피와 살이죠. 근데 그걸 가져와서 “저울에다 달아라.” 그래서 비둘기를 올려놓고 허벅지를 살을 베어서 올렸는데 부피를 보면은 허벅지 살이 더 많은데 비둘기가 더 무겁더라는 거죠. 왕이 그걸 알고 자기 몸을 올려놓습니다. 비둘기와 왕의 몸무게가 똑같은 겁니다. 이건 뭘 이야기 하는 겁니까? 생명은 평등하다는 거죠. 동일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왕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비둘기를 놓아주라. 내 몸을 너에게 주겠다.” 능가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부처님께서 능가경에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고기를 먹지 말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중생의 고기를 먹으면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 말이 되느냐 하는 거죠. 안 된다는 거예요. 고기를 즐겨 먹게 되면은 꿈자리가 시끄럽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보로 사자나 호랑이나 고양이나 살쾡이 같은 그런 과보를 받는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먹지마라, 중생을 위해서.’ 이렇게 얘기하죠. 요즘 안 먹고는 못 배기죠, 그렇죠. 좀 줄이세요. 정말이에요. 저 고기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2003년도에 라다크에 가게 됐었어요. 청전스님하고 같이 가다가 랑둠곰빠, 처음으로 이제 절을 만나게 돼서 갔는데, 그날이 하필이면 티베트 역으로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에요. 근데 거기에 신도들은 전부 다 유목민들입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스님에게 공양 올리는 게 있었는데, 뭘 하나 주길래 한번 먹어보래요. 유목민들이 우리한테 공양 올렸대요. 근데 딱 씹으니까 명태 맛이 나는데, 이게 뭐냐고. 한번 씹어봤어요. 그러니까 야크고기를 말린 것이다. 저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입에 들어가는 걸 빼고는 다 거부했습니다. 그렇게들 얘기해요. “스님은 고기를 안 먹으면 체력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고기를 안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면 “코끼리는 풀만 먹었는데 힘이 왜 그리 세죠?” 제가 그렇게 반문을 합니다. 그래서 절에는 항상 콩자반이라든지 콩나물이라든지 두부가 늘 올라옵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때때로 국수를 먹게 되죠. 단백질 섭취입니다. 스님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고, 생명의 근원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과학자들 천재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고기 먹는 것을 제지 못 했을까요? 무지 때문입니다. 무명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가장 안타까운 중생 중에 하나는 뭐가 있겠습니까? 아귀가 있죠. 제가 아귀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하고, 회향 공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이제 이 공동체 대한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수륙재를 지내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얘기 하는 겁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빨리 경전의 주석서에 보면은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한 사냥꾼이 사슴을 잡아서 사슴의 뒷다리를 잘라서 불에 구워 먹습니다. 근데 목이 몹시 말라. 집안에 물을 아무리 찾아도 물이 없으니까, 절에 가면 늘 절에는 스님들 물을 비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쫓아 내려갔습니다. 근데 그 많은 주전자에 물을 따라도 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화가 나서 스님들을 막 욕을 욕을 하고 있는데, 노스님이 나오더니 막 그 사냥꾼의 얼굴을 보고 “물을 마시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그냥 주전자를 딱 따르니까 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 청년이 물을 마셨습니다. 그래 스님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얼굴을 보니까 아귀로 좀 바뀌어가고 있네.” 사냥꾼은 사냥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처자식이 생기니까 사냥을 더 많이 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많은 생명을 죽이게 되고, 아귀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수행을 하게 되면서 “아, 생명을 많이 죽였으면 지옥에 갈 건데 지옥의 불이 그렇게 무서울까?” 이런 생각을 해서 스승한테 이 얘기를 합니다. “지옥의 불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이렇게 얘기를 하십니다. “그러면 장작을 물에 적셔서 절 마당 위에 쌓아두어라. 내가 지옥불을 가져오겠다.” 그리고 스님께서 앉아 선정에 들어가서 지옥에 가서 조그마한 불씨를 하나 가져옵니다. 가져 와서는 제자 앞에서 산더미같이 쌓은 물에 적신 장작불에 불씨를 떨어뜨리죠. 떨어뜨리는 순간 재로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제자가 깜짝 놀랍니다. 그러고는 이제 더 열심히 수행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아귀이라는 것은 욕망의 표현이에요. 우리는 수많은 아귀들이 있는데, 스님들이 발우공양하고 난 뒤에 그 청수물을 먹을 수가 있어요. 거의 물을 못 마십니다. 물을 마시면 전부 불로 화해서 물을 마실 수가 없어요. 물이 다 말라버리거나 이런 증상이 생기죠. 불쌍한 중생이에요. 이 아귀라는 중생을 구제를 해야 되겠죠. 가장 굶주리는 중생이에요. 대표적인 중생을 얘기하면은 그런 얘기죠. 우리가 수륙재를 지내서 이런 중생들을 구제하는데 회향하는 그 공덕은 어떨까. 회향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죠. 공덕이라고 하는 거는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원인이란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여서 수륙재를 지내는 거는 여러분의 공덕을 짓는 건데, 이것을 회향을 해야 되겠죠. 제가 서울에 살 때가 있었습니다. 80년대 초에 종운이라는 스님하고 조계사를 가게 됐습니다. 그때는 거기 살았었어요. 개운사 안에 중앙승가대학이라고 있었습니다. 강원을 졸업하고 이제 입학을 해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조계사에 가게 돼서 종운이라는 스님하고 같이 이제 도반으로 가게 됐는데, 웬 처녀가 종운 스님에게 물건을 보시를 했어요. 스님은 딱 물건을 받자마자 그 처녀의 옷자락을 딱 잡았습니다. 잡고 붙들고는 그 앞에 있는 다방에 데리고 가서 물건을 다 끄집어 내놓고 이걸 왜 주느냐고 물어보는 거죠. 근데 이 처녀의 모습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키는 작고 등이 굽었습니다. 곱사등을 갖고 있었죠. 근데 얼굴은 미소를 짓고 빛나고 있었어요. 그 연유를 물어봅니다. 왜 이것을 주느냐. “스님 저는 일주일에 두 차례 조계사 가는 날을 정해서 어느 누구에게나 보시를 행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낙담을 하고, 자기 여동생에게는 편지도 오고 선물도 주고받고 애인하고 그러는데 그런 걸 보면서 자살 기도를 두 번이나 하고 죽지 못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인생에 살 만한 어떤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니까 거기 휩쓸려 간 곳이 조계사예요. 그런데 토요일인데 법당에서 청년들의 법회가 열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염없이 거기에 그냥 법당 밖에서 계단에 앉아서 듣게 됐습니다. 법사 스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보시를 하라.” 그 법문을 듣고 이분이 결심했대요. 일주일에 두 번 부처님께 보시를 하겠다. 근데 이분은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물건을 만들어서 보시를 하는데, “내가 이렇게 정성들여서 내가 왜 보시를 하지.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창피스럽기도 하고.” 그러다 참고, 스님 말씀에 따라서 계속 보시를 하다가, 한 3개월쯤 지나서야 비로소 이런 깨달음이 왔다는 겁니다. ‘내가 보시를 하는 것은 본인이 모든 사람들은 다 받아서 이루어진 존재다. 우리는 부모의 은혜를 입고 동식물의 음식을 먹고 공기한테 다 받아서 이루신 존재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니까 베푸는 게 아니라, 당연히 내가 받아서 이룬 존재 그러면 나도 남에게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다.’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거죠. 큰 기쁨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내 몸의 장애가 아니라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장애다’ 하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내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것을 남에게 베풀자. 그러고는 이제 인생을 바꾸게 됐습니다. 보시한다는 건 회향한다는 거에요, 얘기하자면. 그래서 이분은 파랑새라는 익명으로 글도 쓰고, 조계사에서 청소년 상담도 하고, 그러다가 나병 환자촌에 청년들하고 같이 봉사하러 갔을 때 손이 뭉뚱뭉뚱한 나병 환자들이 그냥 고맙다고 그 밥풀 묻은 데 콜라를 따라주는데 아무도 청년들은 받지를 않더라는 거에요. 자기는 받아서 마시고, 같이 포옹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대요. 본인은 생명이라는 것은 받아서 이룬 존재이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어야 된다. 여러분들 태어나고 지금까지 채식만 하시지 않았죠? 고기를 드셨잖아요. 그죠? 저도 어릴 때 먹었습니다. 그러면 미안한 마음도 있어야 될 거고, 생명을 보존했으니까 고마운 마음이 있으면 회향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받았으면은 주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은 이기적인 것이죠.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거 아니에요. 그러면 회향은 어떤 뜻이 있는가. 회쟁론에 보면, 용수보살의 저술이에요. 일단의 장사치라 그럴까, 옛날에는 장사를 하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닙니다. 도적 떼들의 습격도 있고 하니까. 근데 그중에서 이제 장사를 하기 위해서 쭉 가다 보니까 발가벗은 여자애가 추위에 발발발발 떨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한 상인이 갔어. “내 옷을 줄까?” 이러니까 여자아이가 하는 얘기가 “그 옷을 저한테 준다고 해서 저는 입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네가 옷을 입을 수 있느냐” 했더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 밑에 가면 절이 있으니까 옷감을 스님에게 사정 이야기하고 맡기면은 제가 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까 아귀예요. 여자 아귀예요. 그래서 추위에 발발 떨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상인들이 그걸 보고 절에 가서 옷감을 내놓고 이 아귀에 대한, 여자 아귀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알았다고. 보시를 하고 얼마 있어서 아귀가 다시 나타나서 옷을 입고 너무 고맙다고. 이게 회향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어야 되는 것이죠. 삼처회향(三處廻向)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일체중생들에게 우리가 은혜를 입었으니까 다시 돌리는 회향을 해야 될 것이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생사가 없는 도리를 가르쳐주시니까, 부처님께 회향을 해야되겠고, 또 하나는 우리는 이런 회향하는 목적이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서 불사 열반을 얻는 데 있습니다. 이야기하자면.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무주처열반을 얻는 걸 목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깨달음의 회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륙재에 동참을 해서 이 모든 생명에게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사용했던 공덕을 베풀 때는 삼처회향이 돼야 되는 거죠. 마지막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회향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무지가 없어지는, 무명이 없어지는 거죠. 이게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소는 36개월 되면은 도살합니다. 그럼 이제 암소는 좀 놨두죠. 새끼를 낳기 때문에. 그래서 새끼를 낳을 능력이 없으면 도살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소고기를 너무 즐기면은 소로 태어날 과보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요. 소로 태어나면은 36개월 만에 인간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혹시 여러분 개를 키우고 고양이를 키웁니까? 어느 학자가 이렇게 기고를 해놨어요. 고양이라든지 개의 사료를 이 채식으로 전부 다 사료를 돌리면 1년에 약 76억 마리의 소나 돼지가 살 수가 있다했어요. 놀라운 일이죠. 우리는 좀 자제를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회향을 할 때 이제 삼처회향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무지가 깨질 수 있도록,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서원을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공덕을 회향하는 방법입니다, 얘기하자면. 베풀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냥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땅에게 베풂을 받고, 공기 베풂을 받고, 저기 나무들에게 베풂을 받죠, 얘기하자면. 그리고 많은 동물과 식물의 베풂을 받아서 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회향을 하시고, 또 하나는 또 어떻게 해야 되겠죠? 이렇게 모여서 이렇게 공동체를 형성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죽임이 아니고 생명 살림입니다, 얘기하자면. 수륙재를 지내는 것은 생명 살림의 뜻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권유를 해서 진관사만이 아니라 어느 절에도 수륙재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될 거라고 봅니다. 생명은 인간만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얘기죠. 수많은 동물의 종, 식물의 종이 사라지는데 유엔에서 걱정하는 게 생명 다양성에 대한,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왜? 자연이 훼손이 되면 수많은 동물의 종과 식물의 종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인간이 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거죠. 같이 더불어서 같이 살아야 되는데. 그렇잖아요. 그래서 이 공동체, 수륙재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확실하게 우리가 인식을 해야 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저는 두 눈으로 지금 보고 있습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입니다. 저는 수륙재 처음 법문을 하고 있고, 어떤 절에 가서 수륙재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수륙재 법문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같이 이렇게 수륙재에 동참을 하고, 많은 생명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는 것, 이 기후 변화가 앞으로, 딱 이것만 이야기하고 끝내겠습니다. 탄허스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자연 재해가 많이 발생할 것이다. 빙하가 녹아서 일본은 3분의 2가 잠길 것이고, 대한민국의 동쪽에는 한 100리 정도 물에 잠기고, 서쪽에는 한 200리 정도 다시 육지가 올라올 것이다. 중국은 두 쪽 나고, 그리고 전 세계에 수많은 자연재해가 생길 건데, 그나마 대한민국은 자연재해를 가장 적게 피해를 입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그나마 대한민국은 낫다는 겁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이제 앞으로 수많은 자연재해가 많이 생기고, 많은 생명체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그래서 매년 이 진관사의 수륙재, 국행수륙재를 이렇게 하는 거에 대해서 많은 동참을 하시고요. 또 이곳에 누구에게라도 이 생명의 가치를 말씀드리고 같이 동참할 수 있도록, 이 수륙재 그대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동참을 해야 됩니다. 역설을 하셔야 되고요. 이 공동체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더 아마 하겠죠. 살생을 하지 마라 하는 건 계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시면 여러분들이 적어도 그걸 하셔야 되지 않을까. 하시고 계실 거라 보기는 하는데 포살을 하셔야 됩니다. 1년에 한 차례 정도는 보살계 수계식을 하시고, 그리고 보름마다 포살 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비선사는 한 달에 한 번 포살을 꼭 합니다. 포살을 하고 1년에 한 차례 꼭 보살계 수계식을 꼭 하고, 심지어는 유명계까지 합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불명을 주는 유명계 행사까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수륙재와 연관해서 그런 계율 행사, 포살 행사도 곁들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제 공동체의 가치를 선양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여기서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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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10월 1일 국행수륙재 4재 법문
회주 계호스님 2023-10-01
-바보 반특(槃特)비구의 게송으로 절의 정문을 세 번 두드리다- 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법문할 내용은요, <바보 반특 비구의 게송으로 절의 정문을 세 번 두드리다>라고 했는데, 제목이 너무 좀 그렇죠? ‘그냥 반특비구로 해도 되는데, 왜 바보 반특 비구라고 했을까’ 여러분들 의심나지 않습니까? 의심나죠. 바보는 뭐의 반대말이에요? 천재의 반대말이죠. 앞에 왜 수식어가 바보냐 했냐면은, 이 반특비구가요, 너무 똑똑하고 과거세에는 아라한을 다 증득을 했던 분이에요. 근데 살면서 법을 좀 나눠주고 모든 사람한테 알려줘야 되는데, 법을 아낀 과보로 바보가 된 거예요. 보통 경전에서도 나오지만은, 치문에 선사가 어린 동자를 훈계하는 내용에 <쓸어라> 할 때 소지할 때 소(掃)자 있죠, 소하고, 빗자루 추자(箒)가 있어요. 반특 비구는 사실은 주리반특가인데, 그냥 반특가라고 해놨어요. 반특가는 하도 바보처럼 말도 잘 안 듣고 어리숙해서, 부처님께서 “쓸어라” 하면은 빗자루를 잊어먹고, 빗자루로 해라 하면 쓸어라를 잊어버려요. 그러기를 3년 동안 하다가 나중에는 이제 깨달아서 아라한이 됐어요. 그게 치문에 나오는 아함경의 내용이고. 오늘은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의 술천품(述千品)에도 나오는 얘기가 있는데, 법화경에 아라한이 된 바보 반특가존자라고 나왔어요. 그러면 그 내용은 뭔가 하면은, 주리반특가와 형제가 마하반특가가 있었어요. 근데 이 주리반특가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을 창조하는 가운데 으뜸이에요.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을 창조하는 가운데 으뜸이면은 마음으로 뭐든지 다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그 수식어는 마음의 전개에서 능숙한 제자 가운데 으뜸이에요. 그러니까 두 가지 수식어가 있죠.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을 창조한 가운데 으뜸인 제자가 누구예요? 주리반특가에요. 또 하나는 마음의 전개에서 능숙한 제자 가운데 으뜸인 제자가 주리반특가인데, 주리반특가 형이 마하반특가라고 그랬죠. 마하반특가와 주리반특가 형제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습니다. 왜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느냐면은 이 어머니가 부잣집 딸인데 하인하고 좀 눈이 좀 맞아가지고 도망다니다가 큰 길에서 마하반특가를 놨어요. 큰 길에서 도망다니다가. 마하라는 말은 큰 대자의 뜻이에요. 마하반특가는 큰이라는 뜻이고, 반특가는 길이라는 뜻이에요. 큰 길에서 낳아서 마하반특가고. 그럼 동생은 도망다니다가 이제 적은 길에서, 조그마한 좁은 길에서 나와서 주리반특가예요. 근데 이제 형은 아주 똑똑해요. 그래서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라다가, 나중에 이 할아버지가 절에 다니는 걸 좋아해서, 부처님이 법문하는 걸 좋아해가지고 주리반특가하고 마하반특가하고 같이 다녔는데, 마하반특가는 너무 똑똑해 가지고 자라서 부처님 제자가 되어 아라한을 벌써 증득했어요. 형이 아라한을 증득한 위치에 있으니까 주리반특가도 나도 형님 따라서 부처님 제자가 되겠다 하고 절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석 달이 되도록 게송을 하나도 못 외우는 거예요. 형인 마하반특가의 소임은 뭐냐 하면은 공양청을 받아가지고 그 명단을 적는 그런 소임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비구스님들은 다 명단에 적어가지고 오늘 공양이 들어왔으면 다 공양을 했는데, 누구만 제해 놨겠어요? 주리반특가. 못 외우니까 바보잖아요. 이제 신도들한테도 창피하고 자기 동생이지만은 공양에 청하지 않고 딱 체크해가지고 제했어요. 그러니까 반특가가 기분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안 좋겠죠. 막 화가 나가지고 “나 스님 노릇 안 하고 집에 돌아가야 된다”하니까 부처님이 딱 관하고 “안 되겠다.”하고 주리반특가를 불렀어요. 그러면서 천을 하나 줬어요. 이런 천을 하나, 하얀 수건을 주면서 “반특가야, 이걸 가지고 마루를 닦아라.” 그랬어요. 그래서 밀고 당기면서 “라조화라낭 라조화라낭” 마루를 닦자예요. 마루 닦자, 마루 닦자, 마루 닦자 해서 계속 닦다 보니까 마루가 반질반질 빛나는데, 이 주리반특가가 어떤 생각이 나냐면 ‘조건 지어진 거는 변화하는구나.’ 천이 나쁜 게 아니에요. 밑에 뭐예요? 때죠. 때가 이게 조건 지어진 게 변화되니까, 때가 있음으로 해서 이 걸레가 뻣뻣하게 변했으니까, 그 무상의 진리를 또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또 한 번 더 불러가지고 설법을 하시기를, “비단 이것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에도 때가 있는데, 욕망, 갈등, 진심, 악심, 무지, 이런 것들이 다 이렇게 끼어가지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네가 만약에 이런 거를 다 제거하면은 나중에 아라한이 될 것이다”라고 이제 말씀을 해줬어요. 그러니까 이 주리반특가가 열심히 또 하다 보니까 “천이 더러운 것이 아니구나. 마음의 때, 그러니까 탐진치 탐심의 때, 그다음에 성냄의 때, 어리석음의 때 이것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됐구나” 싶어서 열심히 정진해가지고, 욕계를 떠나서 색계의 사선정을 얻어가지고, 아까 뭐라 그랬어요?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을 창조하는 가운데 으뜸이 누구예요? 주리반특가죠. 그래서 마음의 전개에서 능숙한 제자 가운데 으뜸으로 알려진 수행자가 주리반특가예요. 주리반특가가 대단하죠. 그래서 보통 바보 같은 사람을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말해요? 천치란 말도 있죠. 혹시 숙맥(菽麥)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숙맥은 뭐가 숙맥이에요? 콩 숙자, 보리 맥자잖아요. 콩인지 보린지 분간 못 하는 사람을 숙맥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거세에 법을 아끼지 말아라.>. 법을 아끼면은 이런 과보를 받으니까, 우리가 알면 남한테 베풀어서 알려줘야 돼요. 왜 그걸 갖다가 안 알려주고 왜 몰래 하잖아요. 뭐 시험 칠 때 속인들이나 답안지 누가 볼까 봐 그렇게 몰래 하는 거지, 절에 들어와서는 스님들이 그러면 안 돼요. 보살님들도 그러면 안 되겠죠. 오늘 확실히 아셨죠? 법을 아껴가지고 뭐가 됐어요? 바보가 됐죠. 그러니까 과거세에 아라한 증득했지만은 너무 무지하고 이렇게 아껴서 법을 아끼는 과보로 바보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보 안되려면은 법을 널리 펴가지고 “불법을 전합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우리도 배워가지고 잘 널리 알려야 돼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불법을 배울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지만이 그 사람은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복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역으로 복이 안 되면요, 복도 지을 복이 없는 거예요. 복도 지어야지 복을 받잖아요.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남에게 잘해줘야 된다는 이타행을 해야 돼요. 불심무구(佛心無垢)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불심무구. 부처님 마음은 때가 없다 얘기해요. 우리들도 번뇌 망상이 끼어가지고 이렇게 부처님이 안 됐지, 그것만 없으면 아라한을 증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이 주리반특가처럼 되지 말고 법을 널리 펴가지고, 과거에는 그렇다 해도 현재는 깨칠 수 있는 그런 역량을 가지고서 수행을 해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올해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10주년, 조선시대 최초로 왕실 수륙사가 건립되고 수륙재가 봉행된 지 625주년, 정전70주년을 맞이했어요.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국군의 날이죠. 내일은 노인의 날이에요. 모레는 개천절이고, 10월 9일은 한글날이고. 옛날은 10월 24일 유엔 데이라고 그랬죠, 이제 그거는 또 없어졌더라고요. 10월달은 행사가 많아요. 한글에 대한 행사도 많은데요. 여기서는 수행과 신행의 중요한 작법 하나를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국행수륙재를 하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지 국행이라 할 수 있어요. 뭐냐. 처음에는 수륙 도량. 태조 이성계께서 진관사를 몇 번 오셨냐 하면, 세 번이나 거동하셨어요. 임금님이 오시는 걸 거동이라 그래요. 그다음에 수륙사라 해가지고 저기 탑이 있는데, 거기에 수륙사가 3층 59칸인데, 여기 3층이라는 거는 상단 중단 하단을 말하는 거예요. 그럼 상단에는 고려의 사람들을 영가를 넣겠어요, 이조의 사람들을 넣겠어요? 이태조 이성계께서. 이조 사람들이겠죠. 상단에는 이성계, 이씨 왕조의 사람들을 상단에다 올리고, 중단에는 고려에 충신들, 돌아간 사람들, 자기 본인들이 다 죽인 사람들을 중단해 놓고, 하단에는 보통 일반 유주무주 고혼들을 다 하단에 놨어요. 그래서 59칸 수륙사가 있는 사찰은 진관사밖에 없어요. 사당 사자예요. 그리고 수륙답이라 그래가지고, 전답이에요. 거기서 충당해가지고 그걸 가지고 국행수륙재를 지내기 때문에,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진관사 도량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런 걸 알아야 되기 때문에 법문을 많이 들어야 해요. 이런 말씀을 몇 번이나 다 했는데 또 지나면 잊어먹어요. 그럼 또 알아야 되고 자꾸 배워야 되잖아요. 그렇죠? 진관사 도량이 이렇게 맑고, 계속 하루하루 모습이 달라져요. 물론 이렇게 살아가는데 현상이 바뀌어지는 것도 보면요. 저는 요새요, 가만히 보면은 이렇게 걷다가 우리 집 뜰을 이렇게 보면 산당화 있죠, 산당화가 지금 꽃을 피우고 있어요. 그래서 그냥 철없는 산당화다 그러는데, 그게 또 겨울에 동지 지나서 또 꽃이 꽃대가 올라와요. 그래서 이 철없는 불쌍한 산당화 맨날 그러잖아요. 그게 하루하루 관찰해보면은 세상에 제행무상이란 말이 있죠. 살아가면서 이게 영원한 건 없어요. 부처님 진리만이 영원하고 법만이 영원하지. 세상에 이런 다 현상계는 다 바뀌는 거예요. 조건의 현상을 이렇게 주리반특가가 깨쳐가지고 아라한이 됐듯이, 이걸 느끼면은 세상이 무상하니까 부지런히 뭐 해야 돼요? 공부해야 되죠. 그래서 우리가 수행도 수행이지만, 모습도 불교다워서 우리가 <위의가 바로 불교>라고 그랬거든요. 위의는 몇 가지가 있냐면 팔만세행과 삼천위의가 있어요. 세세하게 따지면 팔만가지 세세한 게 다 있고, 삼천 위의는 그 위의가 그렇게 많은데, 한마디로 말하면 위의가 바로 불교라는 그런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 모습도 다른 사람들이 그냥 막 이렇게 다니는 것보다 단정하게 보이면은, 사람들이 ‘스님의 용모가 참 좋다. 용모가 가관이 아니고 용모가, 모습이 참 좋으니까 우리도 저렇게 스님네들처럼 단정하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거예요. 그리고 또 살아가면서 계로서 스승을 삼으라는 말도 있죠, 부처님 유언에.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계행을 열심히 지키고. 진관사가 이렇게 쭉 이어온 것이 또 그랬잖아요. 보시와 계행, 수행이 세 가지라 했는데 따지고 보면 육바라밀이에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고, 그다음에 그걸 줄이면은 계정혜 삼학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다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심이 있어야 되고, 단정해야 되고, 또 묵언을 해야 되고. 여기에서 왜 묵언이란 말이 나오냐면은 법구비유경의 술천품을 보면 바보 반특가 이야기가 나온다 그랬죠. 코살라국의 반특이라는 비구는 주리반특가의 준말이 반특이에요. 그러니까 주리반특가라고 생각하면 돼요. 매우 우둔해서 뭐에게? 500 나한에게 3년 동안 배웠으나 게송 하나도 외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깨우지 못하니까 불쌍하게 여긴 부처님께서 게송 하나를 주셨죠. 守口攝意 수구섭의 말하고 생각함에 신중하고 身莫犯(非) 신막범 행동에 있어 어긋나지 말라.如是行者 여시행자 이와 같이 행하는 수행자는能得度(世) 능득도 능히 큰 깨달음을 얻으리라. 수구섭의(守口攝意), 말하고 생각하며 신중히 하고, 행동에 있어서 그릇되게 하지 말라. 이런 내용이에요. 왜냐면은 제가 이제 신구의(身口意), 손을 가지고 법인 하잖아요. 이 작법이라는 게 법인인데, 밀교에서는 삼밀가지(三密加持), 신구의 삼업을 삼밀가지로 해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그 밀교의 수행법은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밀교가 아니니까, 이 찰요에는 법인(法印)이 굉장히 많이 나와가지고 작법이 많아요. 법인이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합장할 때는 -한번 다 같이 해봅시다.- 이렇게 하는데, 금강건합장은 이렇게 해가지고, 요 오른쪽이 왼쪽을 딱 눌러요. 제가 이렇게 합장을 할 때 “왜 합장을 수계산림 가면 똑바로 하랬는데 왜 스님은 법인하면서 왜 저렇게 할까?” 이건 금강건합장이에요. 그리고 금강박 할 때는 이렇게 하고. 그리고 연화합장 할 때는 연꽃처럼 볼록하게 이렇게 하는 게 연화 합장이에요. 그래서 이걸 넣어서 표시를 하는데. 하도 주리반특가가 뭐를 해도 게송을 못 외우는 거예요. 그래서 <수구섭의신막범.> 여기 지금 보이죠, 저기. 여기 옆에는 이게 소통이에요. 우리가 집에서 말하면 편지꽂이 있죠, 조그맣게 얘기하면은. 근데 이거를 누가 공양을 했냐면은요. 강영식 회장님하고 조명숙 보살이 이렇게 하나하고, 이쪽에는 강혁준, 이재희, 강정율, 강다연, 강은수 가족이 이렇게 소통 시주를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보시를 좀 해가지고 뭐라도 좀 해야 되겠다. 저 금판(禁板)은 주지스님이 했습니다. 다 같이 박수쳐주세요. 제가 지금 금판을 보면서 뭔 생각을 했냐면은 저 금판이 올라가면 체중계같이 저렇게 해놨잖아요. 그러면은 올라가 가지고 그게 넘어지면은 ‘업장이 커가지고 내 몸이 육중해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 마음속으로라도. 근데 요거 <수구섭의 신막범>하면은, 말과, 여기 수구 하면 입을 단속하라는 얘기죠. 그래서 수구섭의, ‘뜻을 생각하고 말을 하고 생각함에 신중히 하라’ 얘기예요.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얘기예요. 그래서 신구의 삼업을. 그리고 신막범, ‘몸으로는 행동을 함부로 하지 말라’인데, 이와 같이 행하는 사람이 능히 도를 깨치리라. (빼보면) 여시행자 능득도 나오죠. 이와 같이 행하는 수행자가 능히 도를 깨달으리라. 이걸 깨쳤어요. 누가? 주리반특가, 아까 반특가 바보 반특가라 그랬잖아요. 주리반특가가 이 게송을 깨쳤어요. (이게 뒷면이고.) 개문게開門偈捲箔逢彌勒 권박봉미륵 발을 걷으면 미륵불을 맞이하고 開門見釋迦 개문견석가 문을 열면 석가모니불을 뵈리니 三三禮無上 삼삼례무상 위없는 분께 아홉 번 절 올리고 遊戲法王家 유희법왕가 법왕의 집에서 즐거이 노니소서. 지금 진관사에서 이거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행하는 얘기인데, 낮재, 밤재가 있죠. 토요일이 낮재잖아요. 낮재 때 시련, 대령, 관욕하고 나서 부처님 앞에 보례삼보(普禮三寶)하는 게 있죠. 개문게라고 있어요. 그래서 권박봉미륵(捲箔逢彌勒), 발을 여니까 미륵불을 맞이하고, 또 개문견석가(開門見釋迦), 문을 여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뵙고, 삼삼례무상(三三禮無上), 무상이 없는 분께 9배 절을 하노니, 유희법왕가(遊戲法王家) 이랬거든요. 법왕의 가에서 즐겁게 노니소서 하는 내용이 저거예요. 저걸 들고 이제 마지막에 우리가 이제 대문 앞에 가서 하면은 그 앞에 이제 시자가 대문을 닫았다가 열어줘요. 빼 가지고 제가 이제 한번 해볼게요. 오늘은 실습이 많습니다. 이쪽을 앞으로 해가지고, 제가 이렇게 들고 있으면은, 이제 어장 스님이 먼저 개문개를 해요. 아까 얘기했죠. ‘발을 걷으니까 미륵불을 맞이하고 부처님 문을 여니까 부처님을 뵈오니 그러니까 위 없는 부처님에게 9번 절하고 법왕의 가에서 즐겁게 노니소서’ 하고 나면은, 제가 이제 옆에서 -일어서서 한번 해볼까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이거를 가지고 문을 세 번 딱딱 두드려요. 그러면 시자가 대문을 열어줘요. 대문을 통해 어장스님이 먼저 가고, 제가 가면서, 뒤에 영가들이 다 올라와 가지고 부처님 앞에다가 쭉 9번 절하고 나서 그다음에 안치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보셨죠? 이거를 금판이라고 그래요. 금판. 몇 백 년 만에 진관사에서 처음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수륙재에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진관사에서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주리반특가가 아까 <수구섭의 신막범 여시행자 능득도>라는 게송을 깨우쳐가지고 있었는데, 하루는 코살라국의 파사익왕이 공양 대접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발우를 들고 가시는데, 부처님이 주리반특가에게 발우을 딱 맡겼어요. 하나하나씩 이제 점검해서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문지기가 아니 바보 반특가는 ‘게송도 하나 못 외우면서 어디 들어가려고 하느냐.’ 그런데 다른 사람 같으면은 나는 게송을 깨쳐서 지금 아라한이다라고 이렇게 말할 텐데 한마디도 안 했어요. 안 하니까 이제 부처님께서 이런 일이 있을 거다라고 아시고는 미리 발우를 준 거예요. 그러니까 나쁜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해도 묵빈대처(默賓對處)하는 게 우리들의 기본이에요. 거기다 말대꾸 해가지고 뭐 깨쳤다, 안 깨쳤다 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제 부처님이 막 공양을 하려하니 발우가 없는 걸 본 거에요. 아라한이면 신통을 가진 분이에요. 벌써 다 보이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팔을 길게 늘어뜨려서 발우를 부처님께 올렸어요. -스님이 받아보세요. 스님이. 오늘은 뭐 실습을 많이 하네.- 그걸 보고 모두 깜짝 놀래요. 팔은 누구 팔이죠? 주리반특가 팔이잖아요. 팔이 부처님 앞에 발우를 딱 주고. 그러니까 파사익왕과 대중들이 깜짝 놀래가지고 그곳으로 몰려와가지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천 마디 게송을 알고 천 마디 문자를 다 알아도 한 마디 게송을 외워가지고 깨닫는 것만 못하다고 딱 설명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누구를 인정하는 거예요? 주리반특가를 인정해가지고 벌써 깨쳤다라는 걸 이제 알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그랬죠. 이렇게 주리반특가가 내민 긴 팔에 들린 발우로 공양을 잘 마쳤어요. 이 게송이 경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준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수행과 실행을 바로 하라는 얘기예요. 여기서는 우리가 終日數他寶(종일수타보)하나 自無半錢分(자무반전분)라 그러잖아요. 아무리 은행에 돈을 많이 세어도 자기 건 안 되잖아요. 그렇듯이 우리가 남의 것만 계속 계산하면 안 되고 자기 스스로 깨달아서 해야지만이 이룰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오늘 부처님께서 이렇게 저희들한테 게송을 주셨는데, 제가 이렇게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것도 우리들의 인연이다. 주리반특가의 내용을 주면서 전전생에 다 깨친 분들인데 법을 너무 아끼는 과보로다가 바보가 됐다. 그래 바보는 되지 말아야 되잖아요. 그렇죠? 여러분들도 오늘 개문게의 게송이라든지, 수구섭의 신막범 여시행자 능득도하듯이 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어가지고. 이 수륙도량은 4가지로 뭐라 그러죠? 무량공덕. 수륙재의 공덕은 무량공덕이에요. 그래 네 가지로 표현하면 무량공덕이기 때문에, 이 수륙도량에 들어와도 뭐가 다 녹는다 그래요? 과거의 삼업이 다 녹고 업장소멸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환희용락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러서, 아주 얼굴도 환하고. 모든 것이 기도하는 사람 보면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맑아요.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맑게 보이는 게 수행자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탐심, 욕심, 진심이 어리석음이 때듯이 우리 마음에는 번뇌 망상이 없어야지만이 바로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전개에 가장 으뜸인 제자 주리반특가처럼 바보는 되지 말고, 깨달음에 이르러서 바로바로 깨닫는 그런 수행력이 돼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오늘 법문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바보 주리반특가가 뭔 게송을 가지고 절 문을 세 번 두드리나 할 거예요. 내용이 뭐예요, 오늘 법문 한 내용이?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말고 행동에 있어서도 신중히 하라 얘기예요. 그릇되게 하지 말고.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 말이 신구의 삼업, 왜냐하면은 법이라는 아사리라고 그러죠, 아사리는 교수사를 아사리라 그래요. 그래서 요새는 조계종에 무슨 아사리, 무슨 아사리 그러더라고요. 문화 아사리, 염불 아사리 아사리. 그러니까 신도님들도 그렇고, 스님네들도 그렇고, 다 같이 맑은 마음으로 수행하면은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거 아시죠? 아까 불심무구라고 그랬잖아요. 부처님 마음은 때가 없듯이 우리도 때가 없이 열심히 수행 정진합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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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24일 국행수륙재 4재 법문
혜국스님 2023-09-24
지심발원 대자대비 불보살님 이 진관사 국행수륙재에 모인 모든 운집 대중과 운집 영가 고혼들을 위하여 증명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과거 전생으로 오늘날에 이르도록 먹은 마음 연기 공성을 깨닫지 못하고, 잠깐동안 빌려 쓰는 이 몸을 나라고 잘못 생각하여 번뇌 망상 감정에 끌려다니느라, 나고 죽는 생사윤회를 하옵는바, 이차인연 수륙재 참회발심공덕으로 필경성불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오늘 이 진관사 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고혼들이여. 당신들이 있어서 오늘 대한민국 땅이 있고, 이러한 우리 눈에 보이는 찬란한 이런 문화들이 내려오고 있는데, 금일 영가들이 삶이 아름다웠다면 죽음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삶을 그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치고 온 중생이 내 몸같이 생각했던 그런 마음으로 장엄을 했다면, 죽음 또한 그렇게 아름답게 장엄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 주어진 주제가 <미래 세대의 불교를 위한 화두>다. 그럼 미래 세대라고 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부처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하셨는가. 부처님께서는 금일 영가들, 우리 몸속에 나라고 하는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삶이 곧 마음이다. 즉 <과거니 현재니 미래를 부처님께서는 재행무상이다> 이렇게 하셨는데, 오늘 이 진관사를 제가 오면서 청주에서 올라오느라고 한강을 지나왔는데, 오늘 오후에 가다 보면 그 한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한강이 있다.’ 그러거든요. 아침에 올라오면서 내가 본 한강물은 분명히 바다로 흘러가 버려서 다시는 볼 수도 없고, 손을 씻을 수도 없건마는, 엉뚱한 다른 강물을 나는 아침에 본 한강물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고 사니, 그것을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착각이라, 번뇌 망상이라고 한다. 번뇌 망상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기 중도에는 과거도 바로 지금이 이 시간이오, 현재도 이 시간이오, 미래도 이 시간이니, 미래의 세대를 위한 불교는 바로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내 마음 밭에 어떠한 씨앗을 심고 있는가, 오늘 나는 어떤 말투를 쓰고 있고, 어떤 행을 하고 있는가, 내 가족들이 볼 때, 내 이웃들이 볼 때, 내 모습이 어떤 씨앗으로 보여지고 있는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우리는 미래의 씨앗을 바로 심는 사람이라 미래가 아름다워진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미래의 가장 큰 걱정은 환경입니다. 환경. 즉 우주 대자연인데, 올여름만 하더라도 얼마나 그렇게 무덥던지, 한국은 그래도 땅의 기운이 좋고 이만큼 이상기후의 폐해를 좀 더 적게 받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볼 때 환경이 이상기후가 될 때 우리 자손들에게 우리가 그냥 있어도 될 것인가, 그냥 이대로 살아가도 될 것인가. 만약 이대로 이상기후가 오고 환경을 파괴하면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어떤 철학에서도, 어떤 종교에서도 나온 일이 없는, 즉 연기 중도법을 설하셨는데, 그 말씀은 뭐냐 하면, <환경과 나와의 관계가 과연 어떠한가> 그것부터 먼저 가르쳤습니다. 그럼 우리 눈에는 이 진관사 와보면 ‘정말 인생을 바치면서 살고 있구나. 열과 혼을 바치는 그런 정성을 느껴서 참 고맙다. 수륙재 하나를 지내는 것만 보더라도 정말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구나.’ 수륙재란 바로 우리들의 삶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의 마음이 깨어 있는가, 깨어 있지 않는가를 바로 보는 것이 수륙재입니다. 그럼 수륙재를 지내는 진관사에 오면 법당이나 이 건물 하나하나 산이나 소나무나 돌 하나하나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오늘 영가들에게 저 앞에 산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가들에게는 산이 없습니다. 진관사 함월당이든 법당이든 문을 꽁꽁 걸어 잠가놔도, 스님들이 “이 나라를 위해서 죽어간 영가들이여, 그리고 심지어 그 외국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나라에서 목숨 바친 영가들이여, 당신들을 위한 수륙재를 올립니다.” 하면 문을 꽁꽁 잠가놨는데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마음대로 들어온다. 이 말이 그럼 문이 있다는 얘기예요, 없다는 얘기예요? 우리에게는 문이 있지마는 영가들에게는 문이 없다는 얘기예요. 그러면 저 모든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상태에 따라서 달리 보이는 것이다. 물을 예로 들자면, 물은 인간이 볼 땐 물로 보이고, 물고기가 볼 땐 허공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유롭듯이, 내가 본다고 하는 모든 것은 내 마음 상태, 내가 익힌 아는 만큼 비친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바로 보면, 환경은 곧 나다, 내가 곧 우주다, 우주가 곧 나다, 하나로 봤습니다. 심지어 이런 법을 듣고 아인슈타인 박사는 부처님이라는 분은 과학의 아버지라고까지 표현을 했거든요. 저는 그래서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뜻을 따르는 불자가 된다는 복이,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스님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아마 내가 과거생부터 금생까지 살아온 몇백 년, 몇 천년 중에 가장 큰 복이었구나. 그럼 왜 그런가를 한번 들어가 보자는 얘기예요. 왜 그런가. 이 앞에, -지금 저 밖에 계시는 분들은 이게 안 보이는데,- 제가 물컵을 하나 들고 있거든요. 물컵을. 그런데 이 물컵이 동그래요. 물컵이 동그라면 물 모양이 동그랗습니까? 네모납니까? 동그랗죠. 그래서 내가 동그란 게 좀 싫다고, 주지 스님이 -저 주지 스님은 원력으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꽉 차신 분인데, 참 내가 그것을 정말 아주 어쩌면 부러워하는 일이기까지도 한데,- 주지스님 보고 “나 이 동그란 컵 싫으니까 네모반듯한 컵 좀 갖다 주십시오.” 하면, 네모반듯한 컵에 이 물을 부으면 이 물은 동그랗습니까? 네모반듯합니까? 그러면 동그란 물을 네모반듯하게 만든 놈이 따로 있습니까? 그릇에 따라서 물이 변하는 겁니까? 그릇에 따라서 네모난 물이 되기도 하고, 세모난 물이 되기도 하고, 동그란 물이 되기도 하고. 조건, 네모난 그릇이냐, 동그란 그릇이냐, 조건, 그걸 인연이라 그럽니다. 인연에 따라서 네모 물이 되고 세모 물이 되고, 영하라고 하는 인연이 오면 얼음이 돼버리고, 영상이라고 하는 인연이 오면 물이 되고, 100도 이상이라고 하는 인연이 오면 수증기가 돼버린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세계를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저는 이 세상에 오온개공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글이 없다고까지 생각을 하는데요, 뭐 다 안 찾아봐서 모르긴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면 여러분들이 반야 심경을 외울 때마다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래 나가는데, 그 오온개공이 저는 미래 세대의 불교를 위한 화두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 왜 오온개공이냐. 그럼 부처님께서 오온이다, 오온이다 하면 이 몸뚱이를 오온이라고 다 생각을 해. 맞긴 맞죠. 오온이라는 게 색수상행식. 요 다섯 가지를 오온이라 그런다 이 말이야.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니 몸뚱이가 오온이란 말은 이 세상이 오온이란 말이다. 온 우주가 오온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한번 봅시다. 온 우주가 오온이라면 내 몸뚱이와 우주를 하나로 본 건데, 그러면 내 몸뚱이가, 혜국 스님이라고 하는 이 몸뚱이가 이 안에서 나라고 하는 놈이 따로 있어가지고 살을 찌게도 만들고 빠지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들고 적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거든요. 내 안에 내가 따로 있다. 그러나 내 몸뚱이나 여러분들 몸뚱이를 가만히 보면, 음식이 들어가고 물이 들어가고 공기를 마시고, 즉 태양 열량을 이제 빌려오고, 온 우주 기운이 나를 살을 찌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들고 병들게도 만들고 빠지게도 만들고 있지. 그럼 이 몸뚱이란 지수화풍, 우주 자연이 키운 음식이 모인 것이지, 나라는 게 따로 있어서 늙지 못하게 하고 아프지 못하게 하는 놈이 따로 없다. 이게 참 믿음이 안 가요.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제일의 공경에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이게 오온개공으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러면 이 몸뚱이라는 게 여러분들이 전부 다 내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내가 따로 있다고. 내가 따로 있다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면 스님은 뭐 아무것도 없는데, 뭘 가지고 그렇게 지껄이고 있고, 우리는 뭘 가지고 이래 듣습니까? 이게 바로 미래 세대를 위한 불자들의 화두입니다. 그래서 함허득통선사 같은 분들은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참으로 뭐라고 표현해도 표현할 수가 없다. 너무나 오묘하고 미묘하여 있다고 하니 없는 것 같고, 없다고 하니 있는 것 같고, 이거는 측량하기 어렵고 말하기 어렵다. 오늘 진관사 수륙재에 오신 모든 고혼들이여, 영가들이여, 이 어떠한 물건인가. 당신들이 오늘 수륙재 지내기를 얼마나 기다리셨고, 기다리고 오늘 와서 염불 듣고 법문 들을 줄 아는 그놈이 과연 누구인가. 스님, 내가 따로 없다면 누가 와서 듣는 겁니까? 이거야말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거야말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조금 이제 내려가 봅시다. 뭐 요즘은 제가 죽도록 법문해봐야 ‘그 양반 뭐라고 지껄였는지 너무 어려워.’ 하는 말을 많이 들어서 약간 지금 주눅이 들어 있어. 내가 어떻게 하면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좀 배워야 되겠는데, 그게 이제 물론 내 허물도 많지만은, 옛날 내가 배울 때는 성철 큰스님이든 뭐 경봉 큰스님이든 전부 다 그 어른들은 “내가 보이나?” “예, 스님 보입니다.” “뭐라고 하노.” “모르겠습니다.” “나가.” 이게 전부 다였단 말이야. 이게 전부 다였어. 그런데 그게 엄청난 가르침이었거든요. 그래 배워놓으니까 내가 이제 좀 서툴러. 이제 좀 쉽게 하는데. 근데 최대한 이제 쉽게 좀 얘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이 세상 살면서 미운 사람 있죠. 가족도 마음에 안 든대요. 대부분 보살들 와서 말 들어보면, 남편 흉 엄청 보거든.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도대체가 마음에 안 들어. 저런 줄 알았으면 결혼을 안 했을 거라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그 보살 보고 웃고 그래요. “당신 위해서 태어난 분 아니거든요. 남편은 당신이 잘해줄까 봐 결혼했지, 당신한테 잘해주려고 결혼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 남편이나 아들, 딸, 말 안 듣는 아들, 딸 말 잘 듣게 할 자신 있습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스님 찾아왔죠.” 그럼 나도 모르니까 부처님께 물어보자.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부처님은 100% 해결을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기법에서 인연법에서 그 사람 되게 밉지? 니가 미워하는 사람이 내가 되게 미워하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좋아서 죽을 지경인 사람이 많거든요. 그 사람 나는 그렇게 미운데, 그 사람 보고 2분의 1 했다는 거예요. 2분의 1이 뭐예요? 반이니까 반했다 이 말이야. 반했어. 딱 반했다 이 말이야. 그러면 그 사람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데 문제는 어디 있어요? 미워하는 내 마음,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대상은 네가 비친 그림자라, 실상이 아니다. 그 역경과 미운 마음, 원망하는 그 사람을 없애려면 만약에 그 사람을 어디로, 외국으로 이민 보내면 네 마음에 있는 기운만큼 그보다 꼭 그런 사람이, 뺑덕엄마 같은 게 하나 와가지고 너를 똑같이 힘들게 할 것이다. 영원히 이어지는 것을 윤회라 그러는데, 윤회를 안 하고 싶거들랑 네 마음만 내려놔버려라. 미운 마음 하나 내려놔 버리면, 이건 내가 미워해서 그렇지 상대방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니구나. 내 남편이 문제도 아니오, 내 부인이 문제도 아니오, 아들, 딸이 문제도 아니오. 이거는 오직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그러면 내 마음을 한번 좋게 쓰면 좋은 식으로 나가고, 좋은 기운이 나오고, 나쁘게 쓰면 나쁜 기운으로 되니까, 내 마음이 고정으로 딱 정해진 겁니까? 생각 일으키는 대로 달라집니까? 그걸 공이라 그래요. 그걸 물이 없는 게 아니고 물이 있고, 얼음이 없는 게 아니고 얼음이 있고, 수증기가 없는 게 아니고 있고, 다 있는데,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주위 여건에 의해서 얼음이 물도 될 수 있고 물이 수증기도 될 수 있으니, 오늘날까지 도둑질을 하고, 죄업을 지어도, 한 생각 딱 수륙재, 수륙재가 그 뜻이니까, 딱 바꿔 먹으면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이번 비 피해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가지고, 사람 살리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구나,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면 그 사람 도덕놈이요? 의로운 좋은 사람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도둑질했던 업에 끌려가면 윤회요. 그걸 딱 끊어두고 나는 이 길 가겠다면 죄하고는 상관이 없어. 그것이 공이라 이 말이요. 그것이 공이여. 그 공이란 나는 제일 지금 어떨 때 보면 요즘 말로 뚜껑이 열리는 이유가 있는데, -요즘 말로 화가 나는 걸 뚜껑이 열린다 그러더라고. 맞긴 맞아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머리에 뚜껑이 있어.- 중국의 대단히 유명한 임어당이라고 하는 그런 대학자도 불교는 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좀 허무적이다. 공이기 때문에 희망이요, 공이기 때문에 무한이요, 공이기 때문에 무한 가능성 부처인데, 와, 공을 그런 대학자도 허무로 봤구나. 공이야말로, 이 공이야말로 삶이요, 희망이라. 이게 바로 미래 세대를 위한 불자들의 화두가 돼야 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생각만 딱 내려놔버리면, 내려놓고 봐봐요. 남편이나 아들, 딸들은 나를 위해서 온 게 아니다. 각자 자기 길을 가니까, 내가 옳다는 거를 인정받고 싶으면 상대방 옳은 것부터 먼저 인정을 하자. 그러면 올 수밖에 없어. 나와 남은 둘이 하나니까. 내 옳다는 고집을 딱 내버리는 순간 내가 편안해지지. 이게 공이 현현이요, 공의 현현, 공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부처님께서 오온개공이다. 여기는 이제 워낙 이제 훌륭한 스님들이 와서 이제 법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법문은 이제 많이 길게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몇 분이요. 몇 분 해요? 그거는 잘못 말씀하는 거요.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한 번 되게 혼난 사람이거든. 청담 큰스님께서 해인사 주지할 때 내 어릴 때 모시고 진주를 갔는데, 진주 호국사에서 법문하는데 주지 스님 보고 언제까지 하면 되냐니까 스님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8시간을 했거든요. 그럼 몇 사람 남아 있게요? 나하고 주지 스님하고 둘이 남았다고요. 둘이. 다 가버렸는데 그냥 법문을 하고 있더란 말이요. 나 그때 되게 혼나가지고, 절대로 나는 50분 이상 하는 법이 없어. 그때 배운 법이여 그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수륙재에 대해서 한번 보자 이 말이야. 영가들이이 세상 원망하는 마음 모든 거는 그건 내가 놔버릴 데 없는 것이다. 그럼 왜 놓아버려야 되냐는 그것만 바로 배우면 되요. 여러분들이 이 수륙재의 고마움을 다 몰라요, 몰라. 과거를 청정해야 한다는 건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의 청정이 미래로 이어지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고마움은 나라에서 하는 일이었거든요, 나라에서. 그러면 스승들은 어떻게 했는가를 한번 보자 이 말이오. 오늘 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들이여, 스승을 찾아가 봅시다. 어떤 스승을 찾아가느냐 하면, 육조 스님이라고 하는 큰 스승을 찾아가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누가 가셨느냐면 청원 행사 스님이, -뒤에는 아주 거룩한 스승이었지만 그때는 이제 공부를 많이 해가지고, 그때도 이제 공부를 거의 다 이루고 거의 도를 통한 분인데,- 찾아가서 질문을 하기를, -금일 영가등이여, 그 스승들이 하는 질문을 들어보면 와, 저런 질문이 질문이구나. 화장실을 어디로 옮기면 좋겠습니까? 하는 그런 거 물어보는 이 질문이 아니고, 내 딸 어느 사위 보는데 사주가 맞습니까? 난 그런 질문을 모르니까 제발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지 말라고. 그건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계급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이 말이야. 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들이여. 이승이라는 계급, 저승이라는 계급, 나는 못났다는 계급, 나는 잘났다는 계급, 쌍놈이라는 계급, 양반이라는 계급, 우리나라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 계급은 대단했습니다. 인도 가면 사성 계급이 대단하다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는요, 양반은 아무리 뭘 잘못해도 쌍놈이 말 한마디 못했어요. 심지어 쌍놈은 노비로 만들어 가지고 요즘 강아지 망아지 송아지 팔고 사고 하듯이 사고 팔고 했다 이 말이야. 그러면 부처님께서 오온개공이라 하신 말씀은 양반이라는 계급도 명색이오, 쌍놈이라는 것도 명색이요. 인간들이 붙여놓은 이름이지만은, 모든 공의 세계에서는 그 사람이 오늘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 즉 삶이 마음이요 현재 생명이다. 이거 기가 막힌 말이구먼. -모르니까 박수도 안 치거든. 모르니까.- 삶이 바로 우리 공의 현현이라 이 말이야. 그러면 삶을 도둑질을 하면 계급에 상관없이 부처님은 그건 도둑놈이다. 아무리 쌍놈이라도 잘 살면 저 사람은 이로운 사람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말씀한 오온개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상놈, 양반, 그런 계급 없이 어떤 삶이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고 미래가 달라지는구나. 그러면 여기서 청원스님께서 질문한 질문은 잘 났다 못났다, 너다 나다, 자연이다 나다, 그러한 모든 분별상에서 벗어나려면, 나 옳다고 하기 때문에 남과 싸우고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싸우지. 여러분들이 불행을 가만히 돌아보면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들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에는 라디오 조그마한 거 하나 있으면 부잣집이었고, 만약 그 집에 텔레비전 하나 있었다면 그 집 애하고 싸움도 못했어요. 텔레비전 보러 못 갔으니까. 그러면 엄청난 부자라고 했는데, 지금 텔레비전 없는 분이 없고 손에 손에다 텔레비전을 들고 다닙니다. 저 휴대폰인가 하는. 할머니보다 100배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천배의 학문을 익혔는데, 왜 저런 묻지마 폭력이 생기고, 진보니 보수니 저렇게 갈등을 해서 싸움 싸움하느라고, 그러한 노력을 우리 국민들에게 정말 정성을 다하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됐지만, 세계적인 데서 또 정말 세계적으로 될 수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대단한 나라거든요. 세상에 그냥 남의 거 얻어먹다가,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알랑미 얻어다 먹던 나라에서 지금 비교가 됩니까? 그러면 이게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가.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놨다. 이 수륙재에 모시는 그러한 모든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은 이게 미래로 이어지기만 하면 묻지마 폭력을 없애는 길이오, 막가파식으로 가는 그러한 법을 해결하는 법이오. 너니 나니 민주니 진보니 보수니 편을 갈라가지고 싸움 싸움 하느라고, 만일 그 노력만, 야 우리 이번엔 이걸 어떻게 할까 이번엔 어떻게 할까, 참 보기도 좋고 아름다울 텐데.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아까 청원 행사를 대신해서 그런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물었으니 그 질문이 대단한 질문이지 않느냐, 이 말 대단한 질문이거든. 그 말은 다른 말을 말하면 뭐라고 할까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금강경에 나오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이 멈춰 있지 않다. 무상하다. 나도 나도 흘러가는 강물이라. 내가 13살에 처음 절에 들어와가지고 이 가사장삼 입고 법당 앞 지나가면, 주지 스님 나이쯤 되는 비구니 스님들이 내 볼때기를 요리 만지면서, “아이고 동자스님 귀엽다” 그러는데 지금 귀여워? 내일 모레 80이야. 다 늙었잖아. 완전히 그냥 다 늙어 간단 말이야. 그러면 늙을 줄 아는 사람은 나도 흘러가는 강물이라. 늙어가는 아름다움, 늙어가는 것이 내 자신이 아름답지 않으면 늙어갈수록 인간은 초라해지지만, 늙어가는 게 소나무 늙어가면 낙락장송, 진관사 주위 소나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나도 그렇게 낙락장송이 되고 있구나. 얼굴은 쪼글쪼글해진다만 내 안의 기운은 젊은이들이 가지지 못하는 그 아픔을 이겨내는 지혜, 넓은 마음, 이 마음이란 좁게 쓰기로 말하면 바늘 구멍보다도 더 좁아져버리고 넓게 쓰기로 말하면 태평양 바다보다도 넓어지는 게 마음이니, 이게 공이 아니고 뭐예요. 그러면 그 약견제상비상, 눈에 보이는 모든 건 허망한데 그 눈에 보이는 그게 허망한 것이 내 분별상, 내가 분별하기 때문에 상이지, 내가 분별하지 않으면 상이 없다는 걸, 내 분별상인 줄 알면, 즉 내 분별상은 내가 만든 거라, 한 생각 일어난 망상 번뇌인 줄 알면 그 자리가 부처요, 즉견여래라 그랬단 말이야. 그러면 이걸 조금만 더 설명할게요. 이 지금 함월당에 드럼통으로 그냥 보리, 콩, 뭐 오징어젓, 그런 것들로 꽉 채우면 우리가 이걸 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쓸 수 없어요. 쓸 수 없어요. 비었기 때문에 써요. 비었기 때문에. 그러면 여러분들이 죄를 퍼지어도, 금일 영가 잘 들어요. 이 진관사에서 해마다 지내주는 이 수륙재가 당신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걸 내가 알기 때문에 잘 들어라 이 말이야. 당신들 본질, 본 마음 연기공성에는 죄가 묻지를 않습니다. 죄가 안 묻어요. 죄가 없다 이 말이요. 그럼 아예 없습니까? 왜 없어, 죄를 지으면 받아야지.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니 법문을 잘 들어요. 그러면 금일 영가 등이여. 이 법당을 온통 비워버리면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본래 이 법당은 비어 있었습니까? 우리들이 잘못해가지고 가득 채웠습니까? 본래 비어 있는 법당인데 우리 욕심으로 채웠다 이 말이야. 그러면 채워 있을 때도 이 허공은 그대로고, 비워도 그대로고, 변함이 없어. 다만 눈에 볼 때 꽉 찰 때는 다른 걸로 쓸 수만 없다 뿐이야.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도 완벽하기 때문에 새로 닦아서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법당 안에 있는 그 가득 찬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이것만 비워버리잔 말이야. 이것만 놔버리면 완벽하다 이 말이야. 금일 수륙재에 참석한 영가들, 해봐, 해봐서 안 되면 내 생명 대신 가져가란 말이야. 해보란 말이야. 한 생각만 딱 놔버려. 그럼 바로 비울 수 있단 말이야. 마음은 한 생각에 의해서 비울 수 있어. 이거를 유심인과(唯心因果)라 그래. 그러면 스승은 뭐라고 했느냐면 “너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이렇게 물었어. 육조 스님은 그거 참 대단한 세계들이거든. 벌써 딱 보니까 ‘저놈이 계급을 벗어났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하지, 만약 분별상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저런 질문 자체가 안 나올 텐데. 이놈의 자식, 참 쓸만한 놈 왔구나.’ 너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하니까, 청원 스님이 대답하기를, 수륙재에 동참한 영가 등이여, “성스러운 진리라도 행하지 않습니다.” 금일영가여 여기에 답이 있어요. 여기에.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건 한 생각 일으킨 내 마음 일어난 공이 현현입니다. 그러니 스승이 얼마나 좋았던지 “너는 어느 산을 찾아가 가지고 수천 명 대중을 깨어있도록 노력하라.” 청원산으로 보냈다 이 말이야. 청원산이라는 건 그래서 청원 행사인데, 금일 영가들 나하고 청원산을 한번 같이 가보자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그 세계를 선적인 언어로 말하면은 바로 불이중도(不二中道)요 무진연기(無盡緣起)다. 그렇게 공의 현현이라는 건 무진하여 다함이 없구나. 바로 영원이구나. 이것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자리야. 그러면 유심인과라는 게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 인과라는 게 네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동시인과, 두 번째는 이시인과, 세 번째는 뭐요? 강약인과, 네 번째 마지막에 유심인과요. 여러분들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아 저 사람은 되게 악하게 사는데도 왜 저렇게 잘 돼요?” 그건 이시인과를 몰라서 그래. 동시인과는 내가 어떤 사람 귀싸대기를 한 번 때리면 그놈도 화가 나서 날 동시에 때리는 거, 동시에 일어나는 걸 동시 인과라 그러고, 내가 오늘 사과나무를 -나도 사과 농사를 석종사에서 한 13년을 지었는데- 심으면 그날 열려요? 물, 비가 와야 되고, 태양이 비춰져야 되고, 흙의 기운을 받아야 되고, 때가 돼가지고 나무가 커서 때가 돼야 열매가 열립니까? 바로 열립니까, 때가 돼야 됩니까? 그걸 알긴 아네. 그러니 악한 일을 해도, 열매 맺듯이, 때가 돼서 다른 시간에 오는 걸 이시인과라 그래요. 이시인과까지도 수륙재에 이분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다음에 강약인과요. 내가 나무를 10년 동안 했는데도 강한 불길이 오면 1시간에 타버려. 여러분들 마음 씀에 따라서. 마지막 금일 오늘 수륙재 영가 등이여, 유심인과라, 유심인과라. 내가 오늘날까지는 도둑질을 하고 못된 짓 하다가 삭발을 다 하고 승복을 입고, “부처님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왜 이리 엉망이었습니까, 눈 온 들길을 걷는 나그네여, 갈팡질팡 걷지 말아라. 오늘 그대의 발자취는 뒷날 후인의 이정표니라. 정말 내 발자국을 돌아보면 여러분들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봐요. 하얀 눈이 왔을 때 어떤 발자국이 찍혀졌는가. 나 미워하는 발자국, 자식들이 내 마음대로 되길 바라는 욕망의 발자국, 그거는 돌아가서 지울 수가 없어, 어제로 돌아갈 수가 없단 말이오. 여고 시절로, 남자 고등학교 시절로 못 돌아가요. 어제로 못 돌아가니까, 만약에 그 발자국 깨끗하게 지워서 언제 돌아가도 아름다우려면 그날부터 반듯반듯한 발자국을 찍어나가면 한참 지나고 돌아보면 삐딱삐딱한 건 안 보이고 반듯반듯한 게 보이니, 이것이 바로 공의 희망이요, 언제든지 내 마음에 따라서 새로운 발자국을 찍을 수 있으니 이것을 유심인과라 그런다. 어제까지 죄를 퍼지어서 나는 죄인이었지만, 오늘 딱 정신 차리고 바로 살면 그럼 죄가 무엇이냐. 본질에는 죄가 안 묻지만, 내 감정에 쌓이고 쌓여서 내가 익힌 습관, 내 감정을 내가 붙들어 놓은 화, 이것을 부처님은 죄라 그랬다. 그것은 내가 착각에 의해서 만들어서 이미 화를 낸 날, 화는 지나가버렸는데 마음에 꽉 붙들고 화병이 되니까 그걸 번뇌 망상이라 그러고 그것을 죄라 그랬다. 그러면 금일 국행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 등이여, 나와 당신은 한 몸이오. 이 함월당 법당이 따로 있다는 건 벽을 쌓기 때문에, 이게 땅이지 벽만 허물어버리면 한 허공이요, 한 허공 한 생명이요, 내가 따로 없다 이 말이요. 내 안에 움직이는 내 생명이나 여러분들 안에 있는 생명이나 우주 법신이라 이 말이요, 한 허공이란 말이야. 우리는 허공의 고마움을 너무 몰라요. 허공 덕에 앉아 있고, 허공 덕에 집을 짓고, 허공 덕에 누워 있고, 허공을 1초도 떠나보지 않고, 허공 없으면 다 죽는대. 허공을 향해서 이 허공 덕에 내가 살고 있구나. 허공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것을 나태주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더구먼. <어디선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이 세상은 찬란한 아침이 오고 어디선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이 세상은 고요한 저녁이 온다. 아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이게 이제 나태주씨 시인데. -(박수)그러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이럴 땐 박수 치고 정말 칠 때는 안 치고 벌써 처음부터 알았어.- 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여, 결론입니다. 이제 한번 돌아보자. 이 자연이 있어서 나고 내가 있어서 자연이라고 하니, 우주 자연과 나는 하나이니, 당신들이 생명을 바친 거는 당신들을 생명에 바친 것이지, 내가 따로 있어서 남에게 내 생명을 바치지 않는 걸 알면, 당신으로 인해가지고 이 나라가 이렇게 아름다워지고 후손들이 이런 수륙재를 지낼 수 있다는 건, 와 정말 한 허공 맞네. 한국 허공이나 미국 허공이나 인도 허공이나 온 허공이 하나인 게 맞구나. 내 생명 네 생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한 생명 한 법신에 의해서 살고 있으니 그거를 부처님께서는 부처라 그랬고 법신이라 그랬으니 그것을 공이라 그런다. 금일 영가여, 공이란 저 허공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허공은 못 만들어.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허공 송을 하는 그 조용필이 허공 말고 조용필 씨가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한 노래 있죠, 그게 왜 나왔어요? 조용필 씨가 경봉 큰스님을 찾아가니까, 경봉 큰스님이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인가” “저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꾀꼬리구먼.” 꾀꼬리처럼 노래를 한다 이 말이야. “그 꾀꼬리가 어디 있어” 이렇게 물었다. 이 말이오. 즉 니가 누구냐. 금일 수륙재를 지내는 모든 영가들이여. 누가 이거 묻겠습니까? 당신 누구요? 당신 누구냐 이 말이야. 저 영국 미국에서 온 사람, 혹시 한국 말 못 들으니까 Who are you? 누구냐 이 말이야. 누구야. 말이 그렇지 영혼들은 그냥 마음이 통하는 거지, 영어 한국어 불어가 따로 없어. 누구냐 이 말이야. 그러니까 조용필 씨가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꽉 막혀가지고 자기를 꾀꼬리라고 해놓고는 못 찾으니까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한 거란 말이야. 그러면 수륙재의 오늘 온 영가들도 아 내가 목숨 바친 그 생명이 나는 누구인가? 이 뭤고. 진관사에서 가는 곳마다 붙여놓은 <여러분은 부처님입니다.> 금일 수륙재에 온 영가 등이여, 당신들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이 희망,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즘 말로 말하면 오늘 영가들은 기분이 째지게 좋은 거예요. 째지게 아주. 오늘 수륙재를 이렇게 해마다 지내가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고, 내 안에 내 생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온 공기와 물과 태양열 에너지와 대지 음식이 나를 왕자 왕비처럼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내 감정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정말 깨어 있어 보자.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를 한번 이제 찾아보고. 금일 수륙재 영가들은 그렇네, 죽음이란 없네. 몇백 년이,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역력하게 이거 들을 줄 아는 거는 독립된 내가 아니라 제법무아로서 연기 공성으로서의 나는 이걸 영혼 생명이요 바로 부처라고 하는구나. 이것이 오늘 수륙재를 지내는 영가들에게 올리는 최상의 선물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영가들이 이렇게 아주 기분이 찢어지게 좋았으면, 여러분들도 오늘 집에 가서 내 마음에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이거 내려놓지 않는 이상, 내 마음에 아름다운 평화,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하는 시구절처럼 세월이 정신없이 나를 늙도록 만드는데 이런 감정 이런 번뇌 망상 요거 가득 채워서 다닌다는 게 이건 정말 아니거든. 사람 한 번 되기 어려우니 부디 마음 농사들 열심히 지내주시기를 바라면서, 원컨데는 수륙재를 이렇게 지내는 공덕, 살아생전 모든 죄업은 번뇌 망상임을 깨달아서, 바로 이 소리와 둘이 아닌 참생명을 깨달아서, 나라리 라라 나라리 라라 태평가를 불러 봅시다.나무아미타불바깥에서 듣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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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17일 국행수륙재2재 법문
영진스님 2023-09-17
진관사 수륙무차대회가 이번이 625년 됐다 합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 그리고 무형문화재가 된 지 10년. 그래서 아주 뜻깊은 이번 2023년 진관사 수륙재입니다. 수륙재라고 하면은 물이나 육지, 그러니까 모든 생명들이 사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태란습화라고 해서 태생·난생·습생·화생 이야기하는데, 수륙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온 우주에 알게 모르게 수많은 영가들이 떠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어디에 집 잡으려면 집 터보고 산세 보고 그러죠. 그런데 영가여도, 이곳은 큰 스님들을 모시고 늘 기도하기 때문에 늘 맑은 영가들이 이 도량에 가득 찰 겁니다. 그래서 다른 데보다는 그런 수승한 기운에 의해서 영가는 천도되게 될 것이고요. 또 오늘 주지스님 말씀 들어보니까, 자운 큰스님께서 이 수륙재를 복원하고 싶으셔서 고민하시다가 이곳을 정하고, 그 도반 스님들하고 칠일 칠야를 연구를 하셨다 해요. 근데 자운스님, 석주스님, 관응스님, 월산스님, 탄허스님 이런 분들은 제가 알기로는 회 이름이 있어요. 여석회(餘石會)라고 남을 려자, 돌 석자, 남은 돌 모임이라고 해서, 그냥 쓰고 남은 거, 그냥 이렇게 당신들이 겸양한 회입니다. 근데 그분들이 결국은 종정도 다 하시고, 조계종의 최고 어른들을 지내셨던, 그러면서도 도반들 간에 서로 겸양하고 이러셨던 분들입니다. 특히 석주스님 같은 분은 종정도 안 하셨는데, 종단에서 전계대화상을 좀 맡아달라니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전계대화상이라고 굉장한 자리예요. 출가하는 스님들이 전부 그 스님의 이름으로 계를 봤거든요. 그런데 “나는 큰 산중에 안 있고 이 서울에 삽니다. 여기 칠보사, 근데 내가 몸이 늙다 보니까 계란은 먹어요. 계란 먹는 사람이 어떻게 전계대화상이요.” 이리 겸양하신 분이에요. 참 대단한 분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원력을 세워서 수륙재를, 옛날부터 오던 그 전통을 되살리시고, 또 지금 주지하시다가 회주로 계시는 계호 스님께서 이제 매년 하는 걸로 이렇게 정착을 시켰다 해요. 지금처럼 온 지구촌에 병자와 어려운 일들이 많은 이런 시기에 아주 적절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어떤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참으로 영가 천도가 뭘까, 진짜 의미는 뭘까>, 이걸 좀 생각해 봤어요. 제 주제는 이제 <물 속의 생명들 또 육지의 생명들도 이 법문을 듣는다.> 이렇게 이제 주지 스님이 법문 제목을 정하셨는데, 그 제목을 보면서 생각난 게 있습니다. 제가 4년 전에 스님들 80명과 티베트를 갔다 왔습니다. 수미산을 순례하려고. 정말 힘들었죠, 고산지대라. 근데 거기 가서 느낀 게 있는데, 거기는 장례법이 4가지로 구분되더라고요. 화장이 있습니다. 화장은 스님들만이 합니다, 티베트는. 일반인은 화장을 못 해요. 그다음에 여러분들 어디 화면에서 보는 천장이라는 거 있지요, 조장이라고도 하고. 저 바위 위에다가 세워놓고 육신마저도 이제 보시하면서 가는 거. 근데 이 천장은요, 우리가 볼 때 흉측한데요. 천장은 아무나 지내는 게 아니에요. 죄가 없는 사람이 천장을 지내요. 죄가 조금 있는 사람은 수장을 합니다, 수장.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물고기를 안 먹어요. 먹을 게 없잖아요, 티베트에. 근데 물고기를 안 먹어요. 수장하기 때문에 안 먹기도 하지만, 물고기 한 마리나 야크 한 마리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이래요. 정말 이 생명 존중 사상에 의해서 야크는 한 마리 잡으면, 거기는 뭐 야크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우유며 야크 털 이런 거 사용하니까, 많은 인원들이 나눠 먹는데, 물고기는 한 마리에 한 사람도 못 먹는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다가 알을 뱄을 때는 몇 억 마리다. 철두철미하게 부처님 사상에 입각해서 그 사람들이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는 옛날에 다 매장을 했는데, 스님들은 화장했어도. 지금은 이제 다 화장 받아들이죠. 매장은 거기서는 매장이 좋은 게 아니에요. 죄가 많은 사람을 매장해요. 그런데 고이 쉬라고 매장하는 거잖아요, 돌아가신 분. 근데 구멍을 하나 뚫어놓고 팔을 하나 내놓고 여기 끈 달아 놔요, 밖에다. 지나가는 사람이 흔드는 거야. 쉴 만하면 흔들고, 쉴 만하면 흔들고, 이러니까 매장당할까 봐 죄를 안 지으려고 해요. 이런 생활화 불교를 하는구나. 우리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 법이 어떻게 수륙재 기간만 있겠어요. 그죠? 그런데 1년 365일 늘 그래야 되는데요. 재라는 것은 가지런히 한다, 삼간다 이런 뜻이에요. 내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수행이에요, 지금 재가. 재가 수행이라고. 평소에 하던 습관도 좀 내려놓고 좀 삼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본래면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이 재인데, 365일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날짜를 정해서 49일 동안 큰 스님들을 모셔다가 법문을 듣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비구니 최초의 어장이라고 하시는 분 어산, 어장이라면 대단해요. 비구니 스님 중에 의식 염불론 최고로 권위 있는 자리가 어장이에요. 어산. 그분이 직접 여러 스님들과 함께 오셔서 집전을 해 주시니까 여기에 참여하신 모든 수중 육지 공중 떠돌아다니는 원혼들이 안식을 찾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 불국토 아시죠? 불국토. 불국토에는 누가 계셔요? 부처님이 계시지요. 그러면 이 땅이 불국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이 스스로 다 부처인데 그걸 모르고 있는 거죠. 그러면은 ‘내가 부처다’라고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안 되죠. 교리적으로 ‘이것은 이걸 것이다’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에 가마솥에 펄펄 끓는 물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진짜 많이 끓은 건 움직이지 않아요. 그래서 뜨거운 물인지 모르고 손을 담그면 어떻게 돼요? 화상을 입죠. 화상 입은 사람은 절대 가마솥에 있는 물 그다음부터는 함부로 안 만집니다. 내가 부처라 해도, 우리가 부처라 해도, 확인하는 작업은 우리가 해야 된단 말이죠. 그것이 수행입니다. 오늘같이 수륙재에 참여한다든지, 참선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한다든지, 부처님 경전을 읽는다든지, 또 자기 여건에 맞게 재능 기부를 한다든지, 수많은 보시를 한다든지, 보시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보시입니다. 그죠? 불사도 보시고. 다 보시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중에 저는 이제 선원에서 왔으니까, 선 입장에서 몇 마디만 하자면, 요즘 스님들을 안 해요. 너무 안 돼요. 이것도 흐름이 있나, 신부님도 안 되고 수녀님도 안 돼요. 독신하는 사람들은 이제 잘 안 하더라고. 그런데 옛날에는 해인사에 암자가 많아요. 그중에 이제 어느 비구니스님 암자에 꼬마들이 많았어요. 꼬마들한테 승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아 놓으면 예쁘잖아요. 그리고 막 천방지축 다녀도 이뻐요. 관광객들이 지나가다가 “너 왜 절에 왔니? 너 왜 절에 와서 사니?” 이래요. 그러니까 아기가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나중에 이제 “스님 이러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어느 스님이 “그걸 묻거든, 세상이 무상해서요.” 이렇게 이야기해라. 그다음부터 누가 묻기만 하면 “세상이 무상해서요.” 그런데 “무상이 뭔데?” 하면은 막히는 거야. 그것만 알려줬잖아요. 이건 지혜를 빌린 거예요. 그죠? 또 하나는 옛날에는 큰 절은 절에다가 두부도 만드는 기계도 있고, 국수 미는 기계도 있고 이랬어요. 근데 작은 절은 반찬을 하려면 두부를 사와야 해요. 날마다 두부를 사오라고 해야 돼요. 동자승이 그 담당인데, “두부 사오너라.” 노스님이 그러면 “예.”하고 이제 마을에 내려가서 두부를 사러 가면, 꼭 그 장사하는 어느 분이 “스님 어디 가세요?” 이렇게 묻는단 말이야. “두부 사러요.” 그 몇 날 며칠 그래도 또 묻고, 또 대답하고, 그러니까 이게 동자승이 또 스님한테 와서 “자꾸 물어서 좀 짜증이 나요. 자꾸 물어요.” “그래? 그러면 묻거든 다음에는 극락정토 간다고 해라.” 기뻐서 내려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스님, 어디 가세요?” 그러니까 “극락정토 가요.”“극락정토는 왜요?” “두부 사러요.” 이게 남의 지혜는 자기 게 아니에요. 그죠? 여러분 극락정토 가셔야지 그러지요, 여기가 극락정토인데. 이렇게 부처님한테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도, 이게 이제 불교는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을 같이 인정을 합니다. 부처님 가피가 당연히 있죠. 그런데 내가 하지 않으면 손뼉도 마주쳐야 되고, 기도도 자기가 해야 감흥이 오죠. 그죠? 부처님의 가피의 유신력을 기르는 것이 이제 타력 신앙입니다. 그럼 자력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뭘까?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기준이 뭘까?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뭐냐 이 말이에요. 많은 8만 4천 법문이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도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있다. 뭐가 있다? 이것도 아니고. 없다. 이것도 아니에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보세요. 내가 오늘 새벽에 여기를 출발하려고 머리를 깎으려고 보니까 바쁠 것 같아서 어제 깎았어요. 어제 깎을 때 내 머리가 맨들맨들 했어요. 지금 까칠까칠해요. 어제의 내가 아니에요. 그죠?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에 집착하는 순간 오늘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죠? 있던 것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근데 우리가 왜 고통이 오느냐 하면 비교하니까 그래요, 비교. 있다 없다 비교하는 거야. 여러분 잘 살다가 동창회 갔다 오면은 배우자한테 불만이잖아요. 그죠? 옛날에는 나보다 공부도 못 했는데 다이아를 이만한 거 끼고 왔다. ‘당신은 뭐 했어’ 이렇게 되는 거야. 비교하는 순간 행복은 없어요. 부처님이 왜 비교를 해요. 그래서 이 중도라는 것은 절대 모양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늘 오면서도, 저도 그런 말 하면서도, 오늘 비 안 오기를 발원했어요. 안 와요. 내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발 5분 전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렸어요. 차를 타기 직전까지. ‘나 차 탈 때 우산 좀 안 받게 해주시오’ 했더니 딱 5분 전에 멈춰서 지금까지 안 와. 늘 마음을 중도에 두는데도 또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좀 이루어지면 기쁜 거예요. 그죠? 또 안 이루어지면 또 슬프고. 근데 진짜 중도의 의미는 그게 아니에요.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또 모든 물건은 존재 이유가 있다. 이게 진짜 중도입니다. 물고기 존재 이유가 있어요. 날아다니는 새도 존재 이유가 있어요. 육지에서 사는 사람들도, 또 짐승들도 다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으로 조금 더 가지려고 기후를 파괴하고, 생명을 함부로 살상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불교는 그러지 않아요. 내가 아는 불교에서의 전쟁은 딱 이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다른 나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크게 전쟁을 일으켜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러잖아요. 불교는 한 번인데 제가 8일 전에 여기 도착했어요, 우즈베키스탄 갔다가. 거기가 대승불교의 꽃을 피운 곳이에요. 구법승들이 신라나 당나라 현장 법사, 서유기가 다 우즈베키스탄이 무대인데. 정말로 이 큰 스님들이 그 많은 구법승들이 그 길을 넘어서 인도로 가서 부처님 법을 구하고 배우고 다시 돌아와서 역경을 하고 이랬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역경하는 스님이 국보입니다. 역경하는 스님. 범어를,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중국 같으면 한문으로 번역하는 거. 근데 아까 반야심경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이런 거 다 스님들이 역경한 거예요. 역경을 하려고 보니까 역경사가 필요한데, 전쟁을 일으켜요. 중국에 있는 전진의 왕 부견이가 전쟁을 일으켜서 한 개, 반개를 얻었다고. 한 개 반개 딱 그걸로 끝난 거예요. 한 개는 구마라집 스님이고 반 개는 외발인 습착지스님입니다.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뺏어온 거예요. 그거 말고는 불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철저히 생명 존중 사상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부득이한 것 말고는. 근데 부득이하더라도 그래서 방생을 많이 하고 보시를 많이 하라는 것이죠. 그러지 않고는 취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나무에 생명이 없어요? 식물도 생명이 있어요. 왜 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드러냅니까. 자기 보호하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필요 없이는 그렇게 함부로 나무를 꺾거나 꽃을 꺾거나 이러지 않아야 돼요. 필요하면 최소한으로 해야지. 그러니까 동물은 보이니까 그걸 하는데, 죽으면 안타깝고 그런데,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식물도 생명이 있어요. 아니 살려고 햇볕 울창한 숲에서도 하늘로만 크잖아요. 햇볕 바라보고. 왜 생명이 없어요. 하물며 인간끼리, 또 자기가 사랑하는 강아지도 있고, 이거 함부로 살상하면 안 되잖아요. 함부로 살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수륙재를 맞이하면서 무차라는 말은 평등하다는 뜻이잖아요. 막지 않는다, 가리지 않는다 이 말이야. 뭘? ‘모여드는 모든 생명을 똑같이 인정한다’ 이 뜻이 무차입니다. 평등. 부처님은 인류 최초의 평등 선언을 하신 분입니다. 왜? 탄생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했잖아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이것은 당신을 얘기한 게 아니고, 개개인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그 부처님의 성품, 본바탕 이것은 위아래로 나눌 수 없다 이래요. 지금은 여러분이 그 말씀을 인정할 겁니다. 그런데 2600년 전에 인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범천에 꼭대기로 나오고, 정수리로 나오고, 옆구리로 나오고 우리와 같이 나오고, 발바닥으로 나와서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 “평등하다.”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의 최초의 평등 선언이고, 또 모든 이에게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주 역사 속에서 가장 성스러운 선언입니다. 그런 우리 부처님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은 일만 하겠습니까. 그죠? 그래서 그동안 좀 미뤄져 왔던 일이 있다고 하면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됩니다. 언제까지 계산만 하고 방향만 잡고 있을 거예요. 방향이 올바르게 정해지면 걸어가는 겁니다. 여기 앞에 여기 계시는 분들은 조금 평균 나이가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하고, 넘기도 했는데, 앞으로 우리가 -아주 젊은 분들은, 양해하세요.- 50년 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죠? 여러분 해마다 이 진관사 수륙대재에 참여하셔가지고 스님들 법문 듣고 이렇게 성스러운 자리를 갖는 게 앞으로 몇 번이나 있겠어요. 1년에 한 번씩 해도 몇 번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느슨할 수가 있습니까? 느슨할 수 없습니다. 느슨해도 좋은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가는 곳을 아는 사람은 느슨해도 좋아요. 내가 가는 곳을 아는 분들은 두려움이 아니지. 근데 내가 가는 곳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이 두렵죠? 죽음이 왜 두려워요? 가는 곳을 모르니까 그래요. 어제 저녁 잘 주무셨나요? 영진 스님 법문 듣는다고, 수륙재 회주 스님, 법해 스님 이런 분들 뵙는다고 못 주무신 분들도 있겠지만, 비교적 잘 거예요. 근데 만약에 여러분이 자다가 눈을 못 뜬다 하면 잘까요? 졸려도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할 거예요. 근데 왜 자요? 오늘 수륙대재 2재에 내가 참여해서 스님들 법문도 듣고, 진관사 스님들 친견도 하고, 염불 잘하시는 어장 스님들 이렇게 법다운 염불 소리도 듣고, 이걸 알잖아요. 아니까 두려움이 아니에요. 근데 만약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모습을, 가는 곳을 안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친 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앉아 죽고, 서서 죽고, 물구나무 서서 죽고. 옛날 스님들 한 분만 더 이야기하죠. 은봉선사라는 스님이 있어요. 당나라 때 마조스님의 제자인데, 이분은 굉장히 괴각이었어요. 괴각이라는 말 아시죠? 성격이 좀 다른 이하고 보편적으로 같지 않았다 이 말이지요. 근데 이제 죽을 때가 돼가지고 고민이야. ‘이거 내가 좀 독특하게 죽고 싶은데 어떻게 죽으면 좀 잘 죽었다고 소문이 날까.’ 제자들을 모아놓고 “얘들아 서서 죽은 이가 있느냐?” “예, 있습니다.” “앉아 죽은 이는?” “있습니다.” 좌탈은 앉아 죽고 입망은 서서 죽는 게 좌탈입망(坐脫立亡), 실제로 많아요. 우리나라에도 많았어요. 6·25 막 지나고 돌아가신 방하남 스님 같은 분은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상원사 큰방에 앉아가지고, 불 내려고 하는데 방하남 스님이 앉아 계시니까 인민군이 불을 못 냈어요. 그래서 아직 그 문수정이 살아있는 거예요. 생사를 초월한 분이니까 그런 거예요. 인민군 장교도 감화된 거지. 근데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탁 앉아서 이렇게 돌아가시고. 서옹 큰스님도 앉아서 돌아가셨어요. 물론 꼭 그렇게 앉아서 돌아가신다고 다 최고고, 누워서 돌아가신다고 최고가 아니고 그런 건 아니에요. 성향 따라 다른데. 은봉 선사는 물으니까 다 있네. 그러니까 갑자기 “물구나무 서서 죽은 이가 있느냐?” 하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딱 물구나무서서 가버린다. “나 간다.” 아니 화장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안 넘어가는 거야. 물구나무서서. 그래 이제 소문이 나니까 그 은봉선사의 여동생이 비구니 스님인데, 수행을 잘하는 비구니스님이었어요. 소문을 듣고 오더니 “오라버니는 살아생전에도 괴각해서 사람들 골탕 먹이더니 죽어서도 그래 사람 골탕 먹이기요. 제발 속 좀 차리시오.” 하니까 넘어가더라고. 생사를 좌지우지한다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두렵지 않고 해서 자유자재한다. 이제 이런 뜻으로 제가 비유를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 진관사 와서 수륙대재 지내고 싶지요. 만약에 0.01%라도 없으면, 없는 분들은 가는 곳을 알도록 하세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남의 힘 빌리지도 않고, 내 힘으로 그냥 극락정토에 가버리면은 그건 필요 없겠죠. 그러지 않으면은 하루하루, 또 수륙대재를 지내는 이 기간만이라도, 우리가 이곳에 와서 마음을 모으고, 부처님께 발원도 하고, 왕생극락을, 또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고, 그런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시면 누구보다도 무량대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복도 많이 지으시고, 그 받은 복을 널리 이웃을 위해서 회향하는 우리 불자들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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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9월 17일 49재 법문
영진스님 2023-09-17
오늘 49재일을 맞이하는 신원적 소천 망자모 영가시여. 잠시 이 진관사에 강림하셔서 법다운 공양 받으시고 부처님 법문을 들으십시오. 영가시여. 오늘 가족 친지가 49재를 맞이하여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드리고, 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이 진관사에 모였습니다. 잠시 이 자리에 왕림하셔서 부처님 법을 들으십시오. 오늘 돌아가신 영가와 이 자리에 참여하신 재자분들한테 다 해당되는 부처님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태어남은 어디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죽어서는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맑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이 잠시 모여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한 조각 구름이 다시 소멸되는 것 같다 했습니다. 나고 죽는 문제가 일대사라고 그럽니다. 가장 큰 문제죠. 그런데 뜬구름에 나고 죽는 문제를 비유했지만, 이 뜬구름 자체도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입니다. 원래 구름으로 끝까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실다움이 없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구름은 비가 되고, 물이 되고, 얼음이 되고, 우박이 되고, 이슬이 되고, 서리가 됩니다. 본질은 같지만 그렇게 수많은 고체, 액체, 기체로 변화하는 것이 구름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다는 것이죠. 뜬구름에 원래 실다움이 없다.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우리들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일물상독로(獨一物常獨露)합니다. 한 물건이 홀로 딱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생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생사를 따르지 않는 이 한 물건이야말로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물건은 있다가 없다가 또 변화하고 이런 거지만은, 이 한마음, 이 본질적인 것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우박이 되고,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듯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모양만 변하는 겁니다. 근데 그 변화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다, 죽었다, 있다,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생사를 따르지 않는 한 물건이 윤회를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원래 생사를 따르지 않는 그 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업력을 짓게 됩니다. 업이라는 것은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습니다. 그 업의 그림자를 따라서 생사를 보고 가는 것이 삶이라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업의 자락을 끊어내야 됩니다. 그래서 49재의 의미는, 돌아가신 지 49일 되는 날이 아주 중요한 날인 게 어떻게 보면은, 그분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물론 수행이 많이 된 분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법문이 필요 없겠지만, 수행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나마 부처님의 가피력과 이 법문의 내용을 듣고, 훌훌 가시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래서 아까 염불에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러잖아요? <나무는 귀의합니다> 이 말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번역하면은 무량광 무량수 그렇습니다. 한량이 없는 수명, 한량이 없는 광명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정성을 들여서 아미타불을 10번만 해도 지옥의 과보는 면한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가 아미타불을 신앙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가와 이 자리에 참여하신 재자분들 눈으로는 모양을 보게 되죠. 그러면 눈으로 모양을 보면은 거기에서 한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안식이라고요. 안계라고도 합니다. 저것은 저렇게 생겼고, 이것은 이렇게 생겼다. 눈이 주관이라면, 보여지는 모양은 대상, 객관이겠죠. 안, 그다음 이, 귀. 귀는 소리를 듣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한 세계가 또 벌어집니다. 이것은 맑은 바람 소리다, 이것은 시끄러운 소음이다. 이렇게 우리가 또 판단하죠. 안이비, 비는 코입니다. 냄새. 이렇게 해서 비설, 혀는 또 말이죠. 신, 몸은 또 몸으로 접촉해서 촉감으로 접촉해서 부드럽다, 거칠다. 이런 느낌이 이런 식으로, 안이비설신의에 의해서 한 세계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가 분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업을 끊으려면은 분별을 떠나야 되는 것이죠. 근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꼭 비교 분석하잖아요. 무엇보다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고 이렇습니다. 근데 옛날 도인들은 그러지 않아요. 불교에서는 핵심 교리가 중도인데, 중도를 체득한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요. 예를 들자면, 옛날 당나라 때 마조도일이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한국불교의 선불교에 끼친 영향이 굉장합니다. 우리가 그 후손들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오는 시자가 산길을 가는데, 시자 스님이 자기 스승 마조 스님을 시험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앞에 가는 큰 스님을 불러요. “스님.”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 하고 돌아보니까, 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로 땅에다가 하나는 길게 긋고, 세 개는 짧게 그었습니다. “한마디 일러보십시오. 짧다 길다를 떠나서 한마디 하시오.” 자기 스승에게 다그친 겁니다. 그러니까 마조스님이 당신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로 한 획을 아무렇게나 하나 긋고, 짧다 길다 말하지 않고 “내가 이거 맞췄다” 이래요. 이게 뭐가 다를까요? 자, 보세요. 질문한 사람은 짧다 길다 생각이 들어가 있어요. 그죠? 상대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마조스님의 한 획은 그것이 없어요. 절대의 한 획입니다. 즉 중도를 체득한 분들은 이런 것이 나온다는 거죠.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더러 선문답하듯이 엉뚱한 소리한다고 이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중도 사상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중도 사상만 녹아들어 있으면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교하고 그래요. 저는 오늘 설악산 백담사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는데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럼 백담사가 아름답다고 하고, 설악산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 보이는 나무, 바위를 딱 잘라서 아파트처럼 획일적으로 해놓으면 아름답다 할까요? 그러지 않죠.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죠. 그렇기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소중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인공이다> 이 생각이 있으면 누구를 헤아릴 필요도 없고, 비교해가지고 낙담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중도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엇보다 무엇이 낫다> 이런 표현은 실제로 불교가 아닙니다. 있다, 없다 이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반야심경에 보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러잖아요.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다. 비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비어 있는 것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모양이 곧 허공이고 허공이 곧 모양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즉이라는 말은 그 가운데 그것이 또 있다는 이야기예요. 틈 없이. 여러분 보이는 이 법당이 참 아름답잖아요. 그러나 이 법당도 공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하죠. 지금 우리가 기후 문제나 지구의 온난화 문제 이런 것 때문에 이상 기후가 오고 이런 말을 부처님은 옛날부터 하셨어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성, 이루어지고, 주, 머물고, 괴, 무너지고, 공한 상태, 이것이 순환된다 했어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일은 평소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며. 또 돌아가셔서는 또 그런 신이 완전히 자기가 자기 힘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법문을 들어야 되는데, 돌아가신 분은 이미 육신을 여의였어요. 우리 영가께서는 이제는 육신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식이 맑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염불도 이거 다, 염불 자체가 법문이거든요. 염불이 전부 법문 내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분명하게 왕생극락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이라는 이 아미타 부처님 어느 곳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하라. 마음에 심두에 꽉 붙들어 갖고 간절히 잊지 말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면은, 생각이 도달하고 생각이 다해서 무념처에 이르게 되면. 무념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망상 번뇌가 없는 걸 무념이라고 그러지, 멍 때리는 게 무념이 아닙니다. 뭘 해도 할 뿐이지, 그 안에 망상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에 도달하는 무념처에 도달하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아까 말씀드린 안이비설신의, 이 육식인데, 이것이 육문인데, 이 육문에서 상대적으로 주관에서 객관을 보고 판단하는 여기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자금광이에요. 자금색. 그 광명을 나툰다. 즉 불교는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즉했다는 말을 아까 드렸죠. 바로 육문에서 그냥 상대적인 세계에 머물던 이 안이비설신의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나타내라. 이 말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49재일를 맞이해서 정성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가족 친지 복위 신원적 소천 망자모 영가시여. 부디 모든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일체의 미련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 친지들을 잘 보살펴서 좋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자비로 섭수하여 주소서.